문종대왕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조선 제일의 미색이라 불릴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로 명성이 자자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탓에 문종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 철없고 도도하고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하기까지하다. 사촌동생인 세령이 가깝게 지내는 유일한 벗이었으나 승유를 사이에 두고 절친했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온 힘을 다해 지켜주고자했던 동생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으면서 남편 정종 역시 수양에게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노비의 신세로 전락하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KBS 공주의 남자 등장인물 소개 중 경혜공주>


단순히 짝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겨 질투하는 서브 여조인 것처럼 나왔던 기사와는 달리, 뚜껑을 열어보니,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어 안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역사적 사실로도 비극적인 인물에, 그를 그려내는 홍수현씨의 연기 덕분에 매력을 더하고 있는 경혜공주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문종은 세자시절 세자빈이 두번이나 폐위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이미 두번이나 세자빈을 폐하였기에, 따로 간택을 하지 않고, 1437년 세자의 후궁이었던 경혜공주의 생모가 세자빈으로 오르게 됩니다. 이로써 경혜공주는 문종의 적장녀가 됩니다. 드라마에서도 보이듯, 친 동기간은 단종이며, 어머니 현덕왕후는 1441년 단종을 낳은뒤 산욕으로 사망합니다. 공주가 1436년생이니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네요..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나이대가 있어 깜빡하게 됩니다만, 단종과의 나이차이는 겨우 5살... 1452년 12살의 나이로 단종이 왕위에 오를때 공주의 나이도 겨우 17세에 불과했군요... 나어린 남매들만 남은 상황에 기세등등한 숙부라니... 참... 암담한 앞날이었네요.. 이들 남매도..



2회를 기점으로 경혜공주의 길례문제가 드라마 전반에 나섰습니다. 1452년 문종의 건강이 최악인 시점에서 사후, 세자와 왕권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주의 길례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만, 실제 상황은 다릅니다.

순의 대부(順義大夫) 정종(鄭悰)평창 군주(平昌郡主)에게 장가들었다.
세종 32년(1450년 경오년) 1월 24일


여기서 평창군주랑, 경혜공주를 이릅니다. 아직 아버지인 문종이 세자이기에 공주가 아닌 군주(세자의 적녀)로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재 1452년인 드라마의 배경보다 2년전에 이미 정종과 혼인하여 출궁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드라마상에서 김승유를 놓고 벌이는 수양대군과 문종과의 알력다툼은 일어날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극적 구성을 위해 역사적 인물과 캐릭터들을 재배치했으니, 이정도쯤은 눈감고 넘어가줄만 하겠지요.. 게다가 1회에서 이미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 재배치하였음'을 알리기도 했구요..

어차피 기록된 사실을 바꿔 이야기가 진행될리도 없으니... 이 기구한 공주님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시집간 공주가 안타까웠는지 문종1년(1451년) 4월 1일자 실록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윤면(尹沔)이 인가 30여체가 철거가 된다는데 어디에 쓰려냐며 문종에게 묻자,

“경혜 공주(敬惠公主)가 지금 집이 없으므로 그 집을 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바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민력(民力)을 보아가며 점차로 성취하려고 할 따름이다. 너희들이 실지로 무엇에 쓰려는지 몰라서 와서 말하는 것인가? 그 까닭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윤면이 다시 공주집을 지으려고 인가를 30여채나 헐다니!! 이미 살고있는 집이 있으니 근방에 집을 사 고쳐주자라고 말하자, 문종은

“지금
영양위가 사는 집은 그가 사사로이 마련한 것이고, 공가(公家)에서 준 것도 아니다. 또 기울어 위험하고 좁기도 하므로 영조(營造)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부마(駙馬)에게는 으레 집 한 채를 지어서 주는 것이니, 지어 준다면 모름지기 터를 가려야 하는데, 다시 어느 곳에서 빈 터를 얻겠는가? 내가 듣기는 어쩔 수 없이 헐리는 집이 다만 7, 8구(區)뿐이라 하니, 어찌 30여 구(區)나 헐리게 될 줄 생각하였겠는가? 만약 그런 폐단이 있거든, 다시 살펴서 아뢰라.”
라고 말하고 시행합니다. 이 문제로 신하들과 옥신각신합니다만, 결국 인가 40여채를 헐고 공주의 집을 새로 지어주게됩니다. ( '')

왕의 딸로, 또 다음왕의 누나로 어느 누구 부러울게 없을 것 같았던 경혜공주였습니다만, 1453년 계유정난이후의 삶이 급격하게 바뀌게 됩니다.
단종 3년인 1455년, 결국 수양대군은 선위라는 형식을 빌어 왕으로 즉위하게됩니다. 이 해에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을 금성대군과 함께 수양대군을 제거하려 하였다하여 영월로 유배를 보냅니다. 이에 공주는 병을 자처하며 남편을 돌아오게 합니다. 세조 1년(1455년) 윤 6월 17일자 기록입니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정종(鄭悰)의 죄는 이유(李瑜) 등의 예(例)가 아니다. 다만 사람이 경박(輕薄)하여 죄인과 사귀어 결탁하였기에 내가 경각(警覺)시키려고 했을 뿐, 본시 외방에 오래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공주(公主)는 문종(文宗)의 맏딸인데 내 어찌 문종을 잊고 그렇게 하겠느냐? 어제 들으니 공주가 편치 않다고 한다. 내 몹시 놀라고 걱정되어 시녀(侍女)로 하여금 문병하게 하고, 또 의원(醫員)과 약물을 보내었다. 이제 상왕(上王)께서 사람을 보내어 이르시기를, ‘영양 위(寧陽尉)의 공주가 그 병을 내게 고해 왔는데, 그의 의중이 아마도 정종을 돌아오게 하려는 것 같다.’고 하였다. 내가 명을 듣고 황공하여 드디어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여 정종을 놓아 보내게 하라고 하였다.”
하고, 이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게 전(傳)을 주어 올려 보내라고 유시(諭示)하였다.

공주는 왕권과 거리가머니 가혹할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을 유배 보내긴 했지만 '친구를 잘못사귀어 그런 것'이니 다른 죄인들과는 다르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의 기록에서도 경혜공주와 정종에게 식량과 노비를 주는 등 대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1456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정종은 죄가 가중돼 광주로 유배를 가지만, 이때에도 공주가 남편을 만나러 갈때 가마를 내어주는 등 대우에 있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조 7년인 1461년 승려 성탄과 함께 모반을 꾀하였다하여 정종이 처형 당하고 홀로 남게 됩니다. 
세조 8년(1462년)
형조(刑曹)에 전지하기를,
“속히 경혜 공주(敬惠公主)에게 속공 노비(屬公奴婢) 50구(口)를 내려 주라.”
하였다.
등을 살펴보면, 남편 정종이 역모로 처형 당한 뒤이지만, 공주와 그 자녀들이 사는데 있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대우는 세조의 아들과 손자인 예종, 성종대까지 쭉 이어지지만, 몸이 편안하다 하여, 경혜공주의 한 많은 삶이 위로 받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뿐인 친동생과 남편을 잃었으니까요... 일련의 시련 탓인지, 성종4년(1473년) 12월 30일 경혜 공주(敬惠公主)가 졸(卒)하였다.
37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합니다. 


기록으로 살펴보면, 대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혈육들을 잔인하게 잃어버린 경혜공주의 마음 역시 그러했을지는 의문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아마도 극적인 전개를 위해서 경혜공주의 삶을 모질게 그릴것 같네요.
앞으로 전개될 경혜공주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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